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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양천구

양천의 유래

양천(陽川)의 유래 
 
우리 양천의 뿌리는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으로 부터 불려지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때는 공암현이라 변경되어 율진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고, 그후 고려 성종 14년에 영토를 5도로 나누어 양광도에 귀속하다가, 현종 9년(1018년)에 공암현을 수주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다가, 이와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양원, 양평, 파릉, 제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비로소 양천이라는 지명으로 명명되어 작음 암굴의 땅 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 14년(1416년)에 다시 양천현으로 복귀하고, 고종 32년 을미개혁때 양천현에서 양천군으로 되었으며, "현내, 남산(목동), 장군(신월동, 신정동), 삼정, 가배곡 또는 가곡"등 5개면이 양천군에 편입되었다.

양천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때는 제차파의현이라 했다.

"제차"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 "양천"의 고명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잿"(성)의 음차일지도 모른다는 설이있다. "파의"는 공암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 "파혜"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므로 잿바위 혹은 갯바위뜻이다.

우리구가 "양천"이라 지명을 얻게 된 것은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햇볕이 잘 들고 냇가의 물이 맑아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애칭으로 양천(陽川)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우리고장의 특성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곳은 어떤 곳인가?

자연의 특성과 풍토는 삶에 어떠한 영향으로 표현되었을까?? 우리고장의 위치는 한강하류 강변지대로서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경인만(京仁灣)에 위치해 있으면서 한강문화권에 속하는 곳으로 동쪽으로는 시흥군 백운산에서 발원한 안양천이 흘러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지양산 줄기를 기준으로 예로부터 부천시와 격리되어 왔던 것이다.

남으로는 구로구 고척동과 생활권이 분리되었고, 북으로는 같은 양천 문화권에서 분구된 강서구와 접경을 이룬 곳이다.

한강 상류의 댐과 안양천 제방이 축조되기전(1937년)만 해도 대부분 침수지대 이었으며, 그 이외의 야산들은 서해안 특유의 지형을 이루고 잇습니다. 교통면에서는 예로부터 한강변에서 부천, 인천, 김포, 강화 등지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며, 농산물이 풍부한 한강권과 해산물이 생산되는 서해로 이어지는 제일 가까운 통행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변의 산들은 낮고 완만하며, 강의 흐름은 느리고, 침수가 될 때면 바다처럼 넓은 강물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넓고 한적한 환경에서 사람의 심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평원으로 불어오는 강바람은 거세게 몰아쳐 춥게만 느껴온 겨울의 풍경, 토질은 점토질이 많고 돌이 흔치않아 문화 유적을 찾을 수 없는 지금은 모든 것이 변하여 지형적인 특성을 느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시 형성 과정에서는 안양천 저지대와 한강, 야산 등으로 가로 막혀 개발이 늦었던 원인이 되었고, 도시 구조면에서는 농경지에서 대부분 주거지로 발전되어 타지역보다 비교적 건전한 생활환경으로 변하였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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