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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 조선의 설계자, 최고의 혁명가

정도전    鄭道傳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高麗)에서 조선(朝鮮)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이상세계(理想世界)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政敵)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伸寃)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정도전(鄭道傳. 13771398)은 고려 말기, 조선 초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며,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우리나라 초기 성리학자(性理學者)의 한 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며,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 이다. 정도전은 1337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유학자이었다. 그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도전(道傳)은 '도를 전하고', 차남인 도존(道存)은 '도를 간직하고', 삼남인 도복(道復)은 ' 도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의 호(號), 삼봉(三峰)은 정도전이 재야시절에 북한산 아래에 있는 삼봉(三峰)이란 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칠 때 삼각산(三角山)과 같이 학문과 경륜과 처세에 우뚝한 봉우리가 되라는 뜻으로 이존오(李存吾), 박의중(朴宜中), 김구용(金九容)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서 지어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정도전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이였다.

 

 

도담삼봉    嶋潭三峰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이곳 도담삼봉(嶋潭三峰)과 이웃한 지금의 단양읍(丹陽邑) 도전리에서 태어났고 (이 또한 다른 의견이 많으며, 그의 출생지나 거주지는 분명치 않다),  도담삼봉에서 그의 아호(雅號)를 따서 '삼봉(三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며, 그의 호가 '삼봉'이 된 유래는 위에 적은 바와 같다.

 

도담삼봉의 유래에 대하여는 '정도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三峰山)이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강원도 정선(旌善)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소년 '정도전'이 ' 우리가 삼봉(三峰)을 정선(旌善)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오,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 '고 한 뒤부터 세금(稅金)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 도담(嶋潭)이 군 북쪽 24리에 있다. 세 바위(삼암.三巖)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도담에서 흐름을 거술러서 수백 보(步)쯤 가면 푸른 바위가 만 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巖穴如門) 바라보면 한 동천(洞天)이 있는 것 같다 '고 수록되어있다.

 

도담삼봉은 도담리쪽 강가에서 볼 때 상류쪽인 왼편에 있는 봉우리가 '첩봉' 또는 '딸봉'이고, 하류쪽인 오른편 북봉을 '처봉' 또는 '아들봉'이라고 한다. 중봉을 '남편봉' 혹은 '아버지봉'이라 부른다. 세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중봉에는 현재 '삼도정'이라는 육각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도전, 출생의 비밀

 

정도전에게는 출생의 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냉대를 당했다. 이색(李穡)의 문하로서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과 당당히 겨루어 실력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주류(主流)로부터 중심세력권의 진입을 거부당하는 비주류(非主流)이었다. 이것이 정도전의 울분이었고, 비분의 원천이었다.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 '김진'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어 종 '수이'를 내쫒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딸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어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주었다. 그 딸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정도전(鄭道前)이다 ... 태조실록

 

다시 설명하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奴婢)의 딸이라는 것이다. 바람둥이 땡초 중이 노비를 건드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것이다. 호적관계가 불분명하던 시대에 확인할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적서(嫡庶)를 분명하게 따지던 당시에 정도전에게는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악재이었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한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고, 태종 조에 편찬된 ' 태조실록 '이 진실인지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의 일부분이고 자료일 뿐이다. 역사에는 사실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진실이라는 속살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후일 정도전이 실권을 잡은 뒤 복수의 칼을 뽑아들게 된다.

 

 

정도전의 생애 초반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幼年)을 보낸 것은 양주 삼각산(三角山)이다. 그의 동지이자 훗날 정적(政敵)이되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시문집과 포은봉사고서(圃隱奉使稿序)의 기록에 ' 15~6세 때 삼각산에서 성율을 공부할 때 정몽주에게 대학가 중용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정도전의 외가는 경상북도 영주(榮州)이다. 영주의 하급군관으로 있는 '영주우씨' 우연(禹延)의 딸이 그의 어머니이다. 아버지가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을 따라 개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이곡(李穀)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李穀)의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성균관 진사로서 '이색'의 제자가 되었다. 이색(李穡)은 우리나라 초기 성리학자로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邇正), 이곡, 이제현(李濟賢)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 후 성균관에서 이색과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나 성리학에 대하여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였다.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그는 성리학적 충효(忠孝)사상과 예학을 배웠다. 당시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 않게 불교와 도교, 무속신앙이 미신(迷信)을 조장한다고 보게 되었다. 현재의 삶조차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인간 세계에서 사후(死後)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생각이라는 공자(孔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무속(巫俗) 신앙 제단 혁파와 불교에 대한 비판을 꾸즌히 키워나갔으며, 나중에 '불씨잡변(불씨잡변)'을 저술하게 된다.

 

특히 당시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그는 정몽주(鄭夢周)와는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하여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外戚)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性理學的 理想鄕)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政敵)으로 돌변하게 된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인 1360년 과거에 급재한 뒤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榮州)에서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3년상을 봉행실천하였다. 영주에서 3년간 여묘(廬墓)살이 하면서 지방의 후학들과 그의 동생 도존, 도복을 가르쳐 성립시켰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

 

1370년 신돈(辛旽)에 의하여 성균관이 중건되고, 그해 스승 이색(李穡)이 대사성이 되자, 그는 '이색'과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새로운 인재를 찾으려던 시중(侍中) 신돈(辛旽)에 의해 신진사류가 중용되면서 그 역시 요직에 앉았던 연유로 신돈(辛旽)의 일파로 몰리기도 하였다. 신돈이 죽자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신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도 정도전은 기용되었으나,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親明派)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그 당시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明)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세족들을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洪倫)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받게 된다.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정도전은 부(富)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田畓)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미신적인 불교의 사상이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극락(極樂)이란 존재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규탄하였다.

 

1375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李仁任)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고자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 '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배 생활    流配 生活

 

이인임(李仁任)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하여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權臣)들의 진노를 사 나주(羅州)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네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인 영주(榮州)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후 1381년 가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초려(草廬)를 지어 '삼봉재(三峰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개하였으나, 이곳 역시 어느 재상이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유배와 유랑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의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정도전의 팔도인물평

 

어느 날, 이성계가 정도전(鄭道傳)에게 조선 팔도(八道) 사람들의 품성을 묻자,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팔도 사람들의 품성을 정리하였다. 요즈음의 우리나라 국회의 모습을 '니전투구'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 본래의 뜻인 강인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흙탕 속에서 서로 물어뜯는 개일뿐이다.

경기도      鏡中美人      거울에 비친 미인   /  

충청도      淸風明月      맑은 바람, 밝은 달   /

전라도      風前細柳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  

경상도      松竹大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   /  

강원도      岩下老佛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   /  

황해도      春波投石      봄 물결에 던지는 돌   /  

평안도      山林猛虎      산림 속의 사나운 호랑이   /  

함경도      泥田鬪狗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石田耕牛       돌밭을 가는 소처럼 우직함

 

정도전이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사람들의 품성을 니전투구(泥田鬪狗) 즉,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처럼 강인하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자기 고향사람들을 개에 비유하자 이성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정도전은 강인함뿐만 아니라 돌밭을 가는 소처럼 우직한 품성도 있다는 임기응변으로 이성계의 심기를 달랬다고 한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정도전이 언급한 팔도사람들의 품성에 대한 이와 같을 것이다. 즉, 경기도 사람은 실속이 없고, 충청도는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 전라도는 부드럽고 영리한 성격, 경상도는 굳굳하고 대쪽같은 품성, 강원도는 산골에서 착하기만 하고 진취성이 없고, 황해도 사람은 바람에 의한 파고(波高)인지, 돌에 의한 파고인지 구분이 안되는 즉,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고, 평안도 사람은 용맹스럽고, 함경도 사람은 악착같고 부지런하며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이 정도전의 평가이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지역의 향리(鄕吏)이었다. 고려시대까지의 향리(鄕吏)는 우리가 아는조선시대의 향리(鄕吏)와는 그 격(格)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奉化)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鄭云敬)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恭悶王)의 유학(儒學) 육성사업에 참여하여 성균관 교관에 임영되었다. 이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정몽주, 이숭인 등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에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李仁任)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元)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羅州)에 속해있는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노(村老)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군사력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성계와의 만남

1383년 가을, 정도전(鄭道傳)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咸興)에 있는 동북면 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倭寇)와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하엿던 정몽주(鄭夢周)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高麗)의 새로운 영웅(英雄)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咸興)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만남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 ? '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하는 뜻을 모를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倭寇)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정도전은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정도전은 군영(軍營)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윟 시(詩) 한 수(首)를 지었다. ... 정도전의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 

 

                                    창망세월일주송           蒼茫歲月一株松

                                    생장청산기만중           生長靑山幾萬重

                                    호재타년상견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부앙편진종           人間俯仰便陳踪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 세상이란 잠깐 사이 묵은 자취인 것을

 

이 시(詩)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이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改革)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易姓革命)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이후 정도전은 1384년 복직과 동시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를 거쳐 1386년 외부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의 물망에 올랐다.

 

 

개혁정치와 정변 기도

 

정도전은 1388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올랐다가 그해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趙浚)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右翼)이 되어 토지개혁(土地改革)을 단행하였다. 그해에는 우왕(禑王)을 내쫒고,이인임(李仁任)의 주장으로 창왕(昌王)을 내세웠다.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崔瑩)일파를 제거하였다.

이때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왔다. 1388년 6월 '제1차 요동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말머리를 돌려 위호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규탄, 공격하였다.

 

 

전제개혁                   田制改革

 

정도전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오른 직후부터 조준(趙浚),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田制改革)에 착수하였다. 조세(租稅) 제도와 토지(土地) 제도를 개혁하여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私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權門世族)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함은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도전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人口數)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친구인 정몽주(鄭夢周)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최영(崔瑩), 이인임(李仁任), 조민수(曺敏修) 등 구(舊)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建國)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폐가입진                   廢假立眞

 

1389년 음력 11월, 여주(驪州)로 유배된 폐주(廢主) 우왕(禑王)이 자신을 찾아와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寶劍)을 내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告變)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禑王)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인임(李仁任)의 주장대로 창왕(昌王)이 즉위하였으나, 정도전은 이성계, 정몽주, 조준, 남은과 함께 뜻을 같이 하여 창왕(昌王)을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최영(崔瑩)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주장하였으나, 우왕이 신돈(辛旽)의 친자(親子)라는 여부는 입증하지 못하였다. 공양왕 추대의 공으로 정도전은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功臣田) 100결(結)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윤이.이초 무고사건                      尹彛.李初 誣告事件

 

1390년 무관 이초(李初)와 윤이(尹彛)는 이성계 일파의 정변(政變) 기도를 감지하고 함께 명나라로 건너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朱元璋)에게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를 없애기 위하여 모의를 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 도착한 이초와 윤이는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에게,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를 반대한 목은 이색(牧隱 李穡) 등을 살해하고, 전판삼사사(前判三司事) 우현보(禹玄寶) 등은 감금,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함께 사신으로 머물던 동지밀직사사 조반(趙絆)이 급히 귀국,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1390년 이성계 등은 사람을 보내 ' 이초와 윤이 '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정도전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 무고사건이 거짓임을 변명하고 돌아 왔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를 계기로 목은 이색, 우현보(禹玄寶)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꾸민다. 그리고 목은이색,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등 고려의 유신(遺臣) 10여 명을 잡아들여 청주 옥사에 하옥(下獄)하는 등 청주옥사(淸州獄事)가 일어났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수하들은 청주옥사에 갇힌 이들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 무렵 청주지방에 갑자기 집중호우가 쏟아져, 청주성의 민가와 옥사가 침수되었다. 이색 등 옥에 갇혀 있던 신하들은 객사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인 압각수 (鴨脚樹  .. 밑부분이 오리 발 모양과 같다고 하여 압각수라 하며, 지금 청주중앙공원에 있다. ) 로 올라가 홍수를 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은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들을 석방시켰다. 후일, 이색(李穡) 등이 올라가 피신한 이 은행나무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은행나무 앞에는 '양촌 권근(陽村 權近) '이 풀려난 후 지었다는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정적의 제거                  政敵의 除去

 

1391년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우군도총제가 되었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상소(斥佛上疏)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신자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던 '윤이,이초 무고사건'의 배후인 이색(李穡)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 .. 우왕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신창(辛昌  ..창왕 .. 역시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류들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하였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이색, 우현보를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정도전과 정몽주                     鄭道傳과 鄭夢周 

 

한 스승아래에서 동문수학하며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낸 벗이지만, 조선 최고의 권력자와 고려 마지막 충신으로 극과 극의 인생을 살게 된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이다. 133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3차에 걸쳐 치러지는 과거시험에서 세 번 모두 장원에 급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보다 늦은 1342년 충청도 단양에서 태어난(서울 출생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도전은 정몽주보다 2년 늦은 해 과거시험에 합격하였고, 두사람은 성균관에서 만나게 된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스승으로 둔 정도전과 정몽주는 서로간의 학문을 도와주며 돈독한 우애를 다졌고, 친원파(親元派)의 계략으로 유배를 떠날 당시에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위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는 2년 유배생활을 끝마친 후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왜(倭)나라와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오며 그 위상을 떨쳤고, 정도전은 청년들에게 유학을가르치던 중 떠돌이 신세로 전락, 백성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개혁의 의지를 다졌다.

 

두 사람은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려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으시켜 정권을 장악한 세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이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에 대한 건국 의지를 밝혔지만, 정몽주는 고려 왕조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정몽주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落馬) 사고를 틈타 정도전을 귀양보냈지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모든 계획이 들통나며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개국공신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지만 이방원이 아닌 다른 형제를 세자(世子)로 내세우는 바람에 또 다시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그해 9월 정도전은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는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諫官)들을 사주하여 정도전이 '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분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 '라고 탄핵하게 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당하였는데,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鄭夢周)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어어 정도전은 나주(羅州)로 배소(配所)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을 당하여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사람을 보내 정도전을 고문(拷問)하는 척하면서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으나, 정도전은 정몽주가 자객(刺客)을 모낼 것을 예상하고 피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 봄, 귀양에서 풀려났고, 고향인 영주(榮州)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海州)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게 되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하여 '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하였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하여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하였다 '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복직하고 개경으로 상경한 뒤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이어 정도전은 향리(鄕里)에 은신하던 중 그해 4월 이방원(李芳遠), 조영규(趙英珪)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擊殺)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후 정도전은 한성부에 내려가 있다가 정몽주가 제거된 뒤 복직, 개경(開京)으로 상경하였다.

 

 

역성혁명                     易姓革命 

 

1392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 왕조(王朝) 창업을 위한 정지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李成桂)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朝宣)을 건국하였다.

 

왕조(王朝)에는 각각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으므로, 왕조가 바뀌면 통치자의 성(姓)도 바뀌게 되며, 신구(新舊) 왕조의 교체는 천명(天命)을 혁신하는 행위라 해서 혁명(革命)이라 불린다. 이와 같이 왕조가 교체되는 일은 방벌(放伐)이라 해서 신왕조가 구왕조를 무너뜨리거나, 선양(禪讓)이라 해서 평화적으로 천자(天子)의 지위를 물려받아도 천명(天命)에 따른 한 정당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부너뜨린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맹자(孟子)에 이르러 혁명시인의 사상으로 정비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오늘날의 혁명과는 그 개념이 다르지만, 중국의 역대왕조는 특히 선양혁명(禪讓革命)의 형식을 빌려서 구왕조에 대신하는 신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보존하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신왕조 창건이 이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해동장량                     海東張良

정도전은 당시의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그의 참모 장량(張良)에 비유하였는데,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장량(張良)이 한 고조(高祖)를 이용하엿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高祖)가 장량을 이용하여 한(漢)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張良)이 고조(高祖)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企劃者)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李芳遠) 등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 편민사목 (便民事目) '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한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었으며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太祖)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의 모두를 정도전에게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漢陽) 천도(遷都) 당시 궁궐과 종묘(宗廟)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및 궁문(宮門)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은 개국공신 1등으로 인정되어 최고의 벼슬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였다.

 

1393년 정도전은 동북면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女眞族)을 토벌, 회유하고 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돌아온 뒤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城)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儒敎)를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首都)의 천도(遷都)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또한 노비(奴婢)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편하여 진법(陳法), 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함경북도 경원(慶源)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치(修治)하고 주, 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성리학, 통치이념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을 지목하였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朱子學)으로 미신(迷信)으로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巫俗)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慈悲)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모니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하고자 아니하였음은 타력(他力)에 따라 기생(寄生)코자 한 것이며,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인심(人心)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儒學)의 대가(大家)였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예악)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堯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불씨잡변                      佛氏雜辨

정도전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저술한 불교(佛敎) 비판서이다. '삼봉집(三峰集)'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마친 뒤, 권근(權近)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난 같은 해 8월에 '왕자의 난'으로 복주(伏誅)되어' 불씨잡면'은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그 유고(遺稿)가 족손(族孫), 한혁(韓奕)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한혁'이 같은 해 과거급제자인 양양부사 윤기견(尹起牽)에게 이를 보였는데, 그가 벽불(闢佛)의 명저(名著)임을 감탄하여 비로소 간행되었다.

 

정도전은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와 불(佛)을 섬기다가 화(禍)를 입은 실례와 천도(天道)를 버리고 불과(佛果)를 이야기하는 모순 등 불료균회설, 인과설(因果說), 지옥설 등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결론적으로 정도저는 불교는 이단(異端)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배불(排佛)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이 논문은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계기가 되었다.

 

 

한양 천도                 漢陽 遷都

 

1392년 8월부터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舊臣)과 세족(世族)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開京)은 신 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었다. 그는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都邑)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漢陽)을 세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정도전은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首都)로 결정한 것은 물론,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의 위치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지금의 인왕산(仁旺山)을 주산(主山)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東向)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王都)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각 궁궐과 전각, 문(門)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하였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사상으로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을 정식 국교(國交)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그 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와 도교(道敎)를 비판하고 유교(儒敎)가 실천 덕목(實踐 德目)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허락 아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殿閣)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儒敎的 德目)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音樂)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 이성계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00 년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경복궁의 인문학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 9월29일, 한양의 북악산 아래 넓은 터에는 390여 칸 규모의 새 궁궐이 들어섰다.  200년 가까이 조선왕조에서 법궁(法宮)의 지위를 유지한 경복궁(景福宮)이다. 새 궁궐의 영건을 축하하며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술이 거나해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鄭道傳)에게 궁궐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과연 정도전은 무엇에 근거하여 궁궐의 이름을 지었을까 ? '태조실록' 1395년 10월 7일의 기록에는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각 건물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意義)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고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이어서 정도전은 침전(寢殿)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한 의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이었으며, 침전으로 시용한 전각이다.  '서경(書經) '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다섯 가지 복(福)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세 번째가 바로 '강녕(康寧)'이다. 수(壽 ..장수), 부(富 ..부귀), 강녕(康寧 .. 평안),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함), 고종명(考終命 ..천명을 다함)의 다섯 가지 복(福)은 그 중간인 '강녕'을 들어서 다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정도전은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도 마음을 바르게 해야 왕의 자리가 세워지며 오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와의 사적인 공간에서도 스스로 경계하여 마음을 바로 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 배어있는 곳이 강녕전이었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녕전에 대해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구주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라는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에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하였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하건데, 전하께서는 무공(武公)의 시(詩)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皇極)의 복(福)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이며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곳이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바로 뒷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경복궁의 편전(便殿)을 사정전이라 한것에 대해서는 정사(政事)를 함에 늘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다음은 실록의 기록이다.

 

사정전에 대해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것 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서 높은 자리에 계시오니, 만인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함이 섞여 있고, 만사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되면, 조칙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히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臣)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은 인왕산과 북악산을 병풍 삼아 우뚝 솟아 있는, 경복궁에서도 제일 웅장한 건물이다. 근정전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한 건물로 경복궁의 중심이었으며 조선왕실을 상징하는건물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건물이다.

 

정도전은 정전(正殿)인 근정전의 이름에 대하여서는 부지런함이 위정자에게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 부지런할 바 '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해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고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고 했으니, 순(舜)임금과 요(堯)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 '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 어진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쓰는데 빨리 한다'고 했으니 신(臣)은 이것으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조선건국 이후의 정권 투쟁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하였다. 특히 그가 주장한 요동정벌(遼東征伐)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요동정벌                      遼東征伐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內政)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女眞)과 제휴한다던지, 요동(遼東)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진출에 관해서는 정도전은 명나라 입장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中原)의 주인이 될 수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에 이른바 ' 표전문 사건 (表箋文 事件) '이 일어났다.

 

표전문(表箋文)이란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表文)을 문제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조정에서는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表文)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鄭摠)이고, 전문(箋文)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향(金若恒)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死地)로 정도전을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후일의 태종(太宗) 계열인 하륜(河崙)만이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여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혁파(私兵革破)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정도전과 이방원 .. 이상과 현실의 갈등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芳碩)을 총애하여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전처(前妻) '한씨' 소생의 아들 중 다섯 째인 이방원(李芳遠)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嫡長子)를 내세우고, 난세(亂世)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 '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왕과 강비(康妃)의 의도와 배극렴(裵克廉)의 주장으로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을 왕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중전의 아들 막내가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하여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 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자신의 의도대로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 정도전은 다시 개혁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傳)', 경세문감(經世問監)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治國)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에 이어 개인 소유의 사병혁파안(私兵革破案)과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을 건의하여 왕족과 공신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急進的)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하여 태조 이서예는 그의 상소(上疏)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역사의 라이벌  ...  이방원과 정도전

 

정도전(鄭道傳)과 이방원(李芳遠), 두 사람은 조선 초기의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을 대표하는 역사적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정말로 역사적 라이벌로 이해할 수 있을까 ? 두 사람은 나이 차이부터 상당하였다. 1392년 조선(朝鮮)이 만들어졌을 때 정도전은 50세의 중년, 이방원은 25세의 청년이었다. 당시로는 아버지와 아들 뻘 정도의 차이였다.

 

두 사람이 살아온 길도 조금 달랐다. 정도전은 경상도 향리(鄕吏) 집안 출신이고, 어머니의 혈통(血統) 문제로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귀족 가문이 얽혀 있는 중앙정계에서 그는과거시험과 자신의 실력만으로 권력의 정글을 헤쳐나가야 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유배(流配)를 갔다. 그후에도 노골적으로 차별(차별)을 받았다. 자신이 세운 삼각산(三角山) 아래 학교를 옮겨야 했고, 이사도 여러 차례 했었다. 아마도 그의 성격은 원칙적이고 때로는 과격했던 것 같다.

 

이방원(李芳遠)은 그보다 좋은 주변 환경에서 좋은 조건으로 살았다. 그는 이성계(李成桂)가 중앙 정계에 등장한 이후에 태어났다. 또한, 이성계의 많은 아들 중에서 드물게 과거(科擧) 시험에 합격하였다. 벼슬길에서도 크게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귀족적 나약함보다 정치적 판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이방원이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는 과정은 그의 냉혹(冷酷)함과 판단력(判斷力)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새 술은 새 부대로

 

정도전과 이방원이 당면했던 현실은 국가운영의 문제이었다. 고려와조는 힘들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국제적을는 새롭게 등장한 명(明)나라와 이전의 원(元)나라 사이에서 방황하였다. 더구나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은 겨디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다. 특히 왜구(倭寇)의 침략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고, 바닷가 지역의 사람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다.

 

국내 상황은 더 문제이었다. 고려(高麗)의 귀족(貴族)들은 지배층이면서도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권력과 경제력을 이용해 남의 땅을 삼켰다. 넓어진 땅에 필요한 일손은 백성을 노비(奴婢)로 만들어보충하였다.  이들에게는 법적 소송도 먹히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을 관료로 만들었다. 세금(稅金)을 내야 할 땅과 군대에 가야할 사람들이 계속 줄어갔다. 한마디로 국가운영이 파탄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감하였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공통점(共通點)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은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이성계(李成桂)와 손을 잡았다. 고려말(高麗末) 여러 지식이니 정도전처럼 개혁(改革)을 생각했다. 그들은 성리학(性理學)을 공통된 이념적(理念的) 무기(武器)로 삼아 현실에 적용하려 했다.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본 불교(佛敎)는 인륜(人倫)을 해치는 껍데기 학문이었다. '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은 이성계와 개혁을 꿈꾸었던 세력이 정치의 전면(前面)에 나서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요동(遼東) 정벌을 추진했던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장군 등은 구세력(舊勢力)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지만, 개혁세력은 점차 분화(分化)되어 갔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어한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적어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틀은유지하려한 이색(李穡), 권근(權近), 정몽주(鄭夢周) 등은 대립해야 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고려(高麗)의 멸망을 재촉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도전의 개혁

 

정도전은 정치의 근본이 민(民)이라고 했다. 유교(儒敎) 정치의 원리인 셈이다. 권력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통치자가 민심(民心)을잃으면 덕(德)이 있는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넘긴다. 그래야만 이성계(李成桂)가 국왕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이 백성에서 선비가 등장해서 관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선비와 농민은 둘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과거 문벌(門閥) 귀족들이 차지했던 관료 자리를 더 많은 계층과 지역에 개방하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지방관(地方官) 등의 천거(薦擧)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관료들은 통치를 위한 지식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반드시 학교를 거쳐 과거(科擧)시험을 보도록 했다. 그는 고려시대처럼 과거(科擧)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의 개인적 인맥(人脈)이 생기는 것을 막고, 이를 위해 사립학교(私立學敎)를 약화(약화)시켰다.

 

정도전이 추구한 것은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국가운영이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제도인 6부(部)를 원리로 한 중앙 관제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권력이 중앙에 모여 마치 물고기를 잡는 그물처럼 행정망(行政網)이 펼쳐지는 그런 국가이었다. 고려의 행정체제는 마치 벌집처럼 복잡한  자율성(自律性)을 지녔다. 이 체제가 고려 말 국가위기에 대응하는 일에 무기력(無氣力)하였다. 국가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와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를 중앙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가문(家門)과 개인 등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식은 이러한 역사적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방원의 개혁

 

이성계가 집권한 이후 정도전이 당면한정치적 문제는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국왕의 후계자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명(明)나라와의 외교(外交)문제이었다. 후계자 문제는 빨리 결정되었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 강씨 ' 소생의 막내가 후계자로 결정된 것이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 한씨 ' 소생으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방원이 그 중에서 다섯째 아들이었다. 정도전 등은 공로가 있는 아들을 세우자는 의견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는 못하고 이 문제는 결국 정도전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큰 문제는 명(明)과의 외교 마찰이었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이 명(明)을 고역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이방원(李芳遠) 등에 대해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특히 명나라는 외교 문서의 문구(文句)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조선에 문서 작성자를 보내라고 유구하였다. 명나라는 정도전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정도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정면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는 요동(遼東) 정벌(征伐)이라는 카드를 거내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정권에 위협이 될 최대 변수, 즉 왕자(王子)와 개국공신(開國功伸)들이 거느린 사병(私兵)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동정벌(遼東征伐) 추진은 조준(趙浚) 등과 같은 개혁파까지 이를 반대하게 한 카드가 되었다. 개국공신들도 자신의 사병(私兵)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찬동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1398년 '왕자의 난 (王子의 亂)'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방원은 일단 형(兄)을 국와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지만, 그는 본인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한편, 수하들을 요직에 포진시켰다. 이방원이 주로 손을 잡았던 세력은 현실 개혁(改革)이 아닌 개선(改善)을 주장했던 세력들이다. 이들은 보수파는 아니지만, 기득권층의 이해(利害)는 나름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사람들이다.   권근, 하륜 등이 그들이었다.

 

물론 이방원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는 숙청(肅淸)이 끝난 이후에는 모든 정치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개혁파이었던 조준(趙浚)은 영의정으로 세웠고, 사돈관계를 맺었다. 또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복권(復權)하고, 정도전의 동생과 아들의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 귀족 가문으로 중심을 재편하였다. 단, 이들 가문 간의 결속력을 막고자 종실(宗室) 세력을 키웠다. 한마디로 이방원은 정도전처럼 중앙 정계에 지방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들의 참여을 막았다. 대신에 이들에게는 군역(軍役)의 면제나 면세(免稅)와 같은 특권을 주었다. 이처럼 정도전이 추구했던 개혁(改革)의 방향은 이방원에 의해 변질(變質)되었다.

 

 

정도전의 최후

 

1398년 10월 6일 밤, 이방원(李芳遠)은 이숙번(李叔蕃)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하였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태조 7년 8월26일자 '태조실록(太祖實錄)'에서는 ' 광화문(光化門)에서부터 남산(南山)까지 철기(鐵騎 .. 철갑옷을 입은 기병)가 그득 찼다 '는 과장된 표현으로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시각, 정도전(鄭道傳)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松峴)마루'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 광장 동쪽에는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다. 그곳이 바로 '송현마루'이었다. 정도전의 측근인 ' 남은(南誾) '의 첩(妾)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정자(亭子)에서 정도전은 남은(南誾)을 비롯한 측근들과 더불어 10월 밤의 정취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은(南誾)의 첩 집 대문 밖에는 두서너 필(匹)의 말이 있었고, 대문근처의 노복(奴僕)들은 잠들어 있었다. 대문 안을 들여다 보니, 정도전과 남은(南誾)을 비롯한 측근들이 등불을 밝힌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방원(李芳遠)과 이숙번(李叔蕃)은 병력 10명으로 그 집을 포위하였다. 이방원 측은 그 집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逃走)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 였던 듯하다. 그런 후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었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그의 군사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하였다. 옆집은 전(前) 판서인 '민부(閔傅)'의 집이었다. '민부'가 먼저 말하였다. 배가 볼록한 자가 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매우 많았다. 이것저것 써야 할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 배가 볼록한 자'라는 말에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였다.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遺言)을 남기고 이방원의 부하에 의하여 목이 베였다.

 

여기서 역사의 기록은 바뀌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의 유언이 무엇인가와 관련해서, 이방원 측의 기록과 정도전 측의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고 이는 것이다. 이방원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기록된 ' 태조실록 (太祖實錄) '에 따르면 , 침실 속에 숨어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부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방원의 부하들이 칼을 버리라고 꾸짖자, 정도전은 칼을 문 밖으로 던지고는 이방원에게 애걸복걸하였다고 한다. '태조실록'에서는 그가 ' 바라옵건데, 한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으니, 바라옵건데 이번에도 살려주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에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다 '는 것은 조선 건국 직전에 정몽주(鄭夢周)가 정도전을 암살하려 했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함으로써 정도전이 극적으로 회생한 일을 가리킨다. 정도전의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이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문집(文集)인 ' 삼봉집 (三峰集) '에는 위와 같은 '태조실록'의 기록을 반박하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詩) 한 수(首)가 그것이다. 제목은 ' 자조(自嘲) '이다. 즉, ' 나를 비웃다 '라는 의미의 시(詩)이다.

                      操存省察兩加功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공(功)을 세워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들

                      松亭一醉竟成空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

 

이 시(詩)에 따르면, 죽기 직전 최후의 순간에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이방원 부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詩)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敗將)의 모습이다.

 

이 시(詩)에서 나타난 또 다른 정도전의 이미지는, 최후까지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는 한 혁명가(革命家)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관조(觀照)하는 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는 한잔의 술과 함께 물거품이 된 57년 인생을 관조하는 모습이다.이방원 측이 정도전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일에 급급하였다는 점, 이방원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위 시(詩)가 정도전의 문집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우리는 정도전의 마지막 유언이 '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 자조(自嘲)'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여튼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때 두아들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들다가 살해되고, 얼마 후 조카 정담(鄭澹)은 큰 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하였다. 맏아들 '정진'은 삭탈당하여 수군(水軍)으로 충군당하였다. 그에게는 종친(宗親)과 공신(功臣)들을 모해(謀害)하고 왕자들을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피살 당하였다.

 

 

정도전의 묘(墓)

 

정도전의 묘(墓)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는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 사리현(沙里縣)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음력 8월, 이방원에 의하여 말살당하엿으나, 맏아들 '정진(鄭眞)'만 살아 남아 수군(水軍)으로 충군되었다가 1411년(태종11)에 복직되어 나주목사로 중용되었으며,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重建)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여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경복궁을 중거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정도전의 죽음은 그 자신의 재상(宰相) 중심주의 혹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막강한 사병(私兵) 세력을 보유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왕자들과의 ' 마지막 힘 겨루기 '에서 패배한 것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사병(私兵)조직을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려 했다. 왕자들의 힘을 빼놓는 동시에 자신이 중심에 서 있는 중앙집권정치를 확고히 하겠다는 1석2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왕권과 신권                              王權과 臣權

 

당연히 왕자들은 이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왕자들 가운데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李芳遠)은 '기습전'을 통해 정도전을 피습하였다. 이는 왕실세력과 신권(臣權)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조선 초 권력다툼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역사만 본다면 승자(勝者)는 왕실세력이다. 하지만 전체를 바라보면 조선의 역사는 신권(臣權)의 승리이다. 겉으로는 '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다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왕권(王權)을 그리 강력하지 못했다. ' 성리학(性理學) '으로 무장한 신권(臣權)은 왕들을 압박하는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왕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 당파(黨派) '라는 신권(臣權)을 이용하는 모습까지 보이기에 이른다.

 

 

폄하와 복권                           貶下와 復權

 

정도전의 사별(私兵) 혁파와 과전법 시행에 크게 반발하였던 조준(趙浚)은 정도전이 죽자, 정몽주(鄭夢周)가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고 주장, 정몽주의 복권을 상소하였다. 조준(趙浚)의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태종(太宗) 때에 가서 받아들여져 정몽주(鄭夢周)는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이 죽은 뒤 동생 정도복(鄭道復)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있었고, 아들 ' 정진'은 세종대왕 때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대왕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士林派)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정도전은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宣祖) 때 ' 정여립의 난 (鄭汝立의 亂) '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 수가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三峰)'으로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가서 허균(許筠)이 정도전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문집을 간행하였으나, 허균(許筠)은 곧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영조(英祖) 때에 가서야 영조(英祖)가 그의 저서 '삼봉집 (三峯集)'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復權)의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1865년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功)을 인정하여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정도전을 복권하여 주면서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후 고종(高宗)은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양성현( 현, 안성시 공도면과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祠堂)을 건립하였다. 고종(高宗)은 정도전의 위업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정도전과 정몽주 .. 반전의 과정

 

조선 주자학(朱子學)의 첫머리에 놓이는 정도전(鄭道傳)과 정몽주(鄭夢周)의 형가에 대한 반전(反轉)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을 설계(설계)한 기획자이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한 혀명가이었고, 주자학(朱子學)을 통치 원리로 세운 유학(儒學)의 대가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간신(奸臣)으로 낙인찍혀 배척당했다.

 

그가 공식적(公式的)으로 복권(復權)된 것은 고종(高宗) 2년인 1865년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을 설계한 공(功)이 있다는 것이 복권(復權)의 이유(理由)이었는데, ' 경복궁을 설계한 공(功)은 인정받았으나, 조선왕조를 설계한 공(功)은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  반면에 조선의 건국세력과 대립한 정몽주(鄭夢周)는 뒷날 조선 주자학(朱子學)의 우두머리로 등극했다. 이런 반전(反轉)의 과정에 권력(權力)의 논리(論理)가 작용하였다.

 

1392년 7월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올라 즉위(卽位) 교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임금의 존재 이유를 간략하게 밝혔다. ' 하늘이 백성을 낳고 임금을 세운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을 길러 서로 살게 하고 백성을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군도(君道)에는 득실(得失)이 있고, 인심(人心)에는 복종과 배반이 있으니, 천명(天命)이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은여기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이다. '

 

정도전(鄭道傳)이 쓴 이 교서(敎書)는 맹자(孟子)의 혁명논리(革命論理)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금이 임금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인심(人心)이 돌아서고 천명(천명)이 떠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도전은 맹자(孟子)의 민본주의(민본주의)를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에서는 군주(君主)의 정통성을 천명(天命)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天命)은 궁극적으로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 맹자에게 정치적 행위의 현실적 근거가 민심(民心)이라면, 이념적(理念的) 근거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도전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전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 얼굴 마담 '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건국이념(建國理念)에 맞추어 조서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실력자 이방원(李芳遠)이 그 건국(建國)의 길에 최대 걸림돌로 등장했는데, 결국 그는 이방원 세력한테 붙잡혀 참수당하고 만다.

 

조선의 설계자(設計者) 정도전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지위로 떨어졌다. 반면에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하다가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죽었던 정몽주(鄭夢周)는 그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왕(王)이 된 직후 복권(復權)되어 충신(忠臣)의 자리에 오른다. 이어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주자학(朱子學)의 태두(泰斗)가 된다. 정몽주복권은 ' 충신 이데올로기 '를 확립하려는 왕권(王權)의 뜻과 주자학(朱子學) 이념을 튼튼히 세우려는 신진(新進) 사대부(士大夫)의 뜻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성문(成文) 헌법의 유무(有無)는 조선시대와 고려(高麗)시대를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기존의 관습법(慣習法)이나 중국 법률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성문 헌법인 ' 경국대전 (경國大典) '이 완성되어 국가 운영의 체계가 잡혀갔기 때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헌법으로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많은 한계점도 있다.  과부(寡婦)의 재가(再嫁)를 금지한 것이나, 서얼(庶孼) 자손에 대한 영구한과거(科擧) 응시 금지 조치, 노비(奴婢)에 대한 매매(매매)의 허용 등 시대적 한계성을 보이는 내용들도 다수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경國大典)이  만세불변(萬歲不變)의 법전을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과정이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상당한 합리성을 보인 규정들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